주일 아침 9시쯤 되어 노씨 부인은 나를 데리러 삼촌 집에 왔다. 나는 점심때쯤 돌아올 그 시간까지 삼촌댁에게 아무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모든 일을 마치고 노씨를 따라 나서려 했다.
[너 그 옷을 입고 갈거야?]
사촌 정이가 물었다. 나는 매일 입고 다니는 초라한 옷차림대로 나서려고 했다.
[얘 정아야. 너 내 옷 입고가. 빌려줄게.]
정이가 또 말했다. 삼촌댁은 눈을 흘기며 정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쓸개 빠진년....]
삼촌댁이 정이를 뚫어지게 옆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마! 제가 저렇게 입고 나서면 엄마를 욕해.]
정이의 말을 듣고 삼촌댁은 창고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정이가 주는 옷을 입고 노씨 부인을 따라 나섰다. 기쁨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노씨 부인은 나의 팔에 자기 팔을 꼈다. 마치 두 초등학생들이 함께 팔을 끼고 걷는 듯한 느낌을 느끼면서 마음이 천진하고 순진해진 나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아줌마! 고마워요.]
천진한 미소를 노씨 부인에게 보내며 나는 말했다.
[얘. 나도 참 기분이 좋다. 넌 내 동생처럼 느껴져. 나도 부모 없이 자랐단다. 난 할머니가 키웠는데 그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지금 난 아무도 없어. 나 혼자야. 그래서 난 너에게 관심이 많이 간다. 우리 서로 의지하면서 살자.]
노씨 부인은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김살도 없고 어두운 그림자도 전혀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 같이 순전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나는 느끼면서 그녀에게 신뢰가 갔다. 그와 함께 그리워하던 교회를 갈 수 있다는 것은 행복감을 이미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삼선교에 있는 구세군 교회를 들어섰다. 그곳은 아주 초라하게 생긴 건물 이였다. 전쟁 후 집을 잃은 사람들과 이북 땅에서 남쪽으로 피난 나온 사람들이 정착할 곳을 찾아다니다가 삼선교 안쪽 산등성 공동묘지가 있는 빈터들에 올망졸망 무허가 천막집과 판자 집을 세우고 동네를 형성한 곳이 있었다. 그 가난한 동네 사람들을 위해 동네를 들어서기 입구 쪽에 이 교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교회는 50 여명의 교인들이 있었고 대 예배시간에 “노 집사”가 전도해 온 김정아 는 새 교인으로 환영을 받고 그 날로 교인으로 입적(入籍)이 되었다. 그 날 모든 교인들은 전란 후 의 가난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밝고 순수해 보였고 소망이 넘치는 듯 보였다. 그들은 또한 수용소에서 보았던 힘없고 지친 얼굴들이 아닌 기쁨과 소망에 넘친 모습들이었다. 그곳에는 내또래의 학생들이 10 명 이 넘었고 또 대학 1 학년생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활기차 있었고 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다. 나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모두 자기들처럼 부모가 있고 학교에도 재학 중 인줄 알고 있는 듯 했다.
“반가워. 몇 학년이지? 어느 학교?”
여학생들이 내 곁에 와서 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