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욥기서 5:1-17 (당신은 엘리바스처럼 설교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당신이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도로서 고난을 경험했다면 엘리바스와 같은 설교자의 말씀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정곡을 찌르는 진리와 지혜의 말씀으로서 어디 하나 저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 말씀을 따라 더욱 열심히 기도 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고난에서 벗어나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 설교의 말씀은 틀림없는 진리이고 당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말씀임을 긍정 하신다 해도 당신의 감정은 때로 여전히 절망의 늪 속에 허덕이고 있을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해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진리와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사랑과 이해에서 참고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 을 얻게 되셨을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의 말은 인생의 상태와 선악의 결과를 진실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을 향한 그의 마음 자세는 친구와 함께 해 주는 '이해와 사랑'에 기인되기 보단 높은 강단에 선 선지자의 선포였습니다.

    그 당시 욥 이 필요한 사람은 진리를 선포해주는 설교자가 아니라 함께 고통에 동참해 줄 수 있는 친구였습니다. 울부짖는 욥 을 향해 '불평' 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설교 하기를 주저치 않은 친구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과 고통과 슬픔을 이해해 주지 못한 무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진정한 '친구' 이었다면 욥의 한숨과 심령에서 흘러나오는 절망의 절규를 감정이 입적 입장에서 잠시나마 함께 아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높고 우월한 지혜자의 입장에 서서 낮고 무지한 사람에게 설교하고 권면하고 지시하듯 동료인 욥에게 자기중심적인 교만한 태도를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욥 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앞뒤가 캄캄한 흑암 속에서 '죽고 싶다' 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동방의 의인으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바스보다 지혜가 짧아서도 아니요 무지해서도 아니었고 신앙심이 약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무엇하나 엘리바스 보다 못한 면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 를 들어야만 할 이유와 까닭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의 인생에 예기치 않게 들이닥친 고난의 시간들을 대면하고 통과하면서 쓰라린 괴로움을 절규하며 솔직한 감정을 토해 냈을 뿐이었습니다. 그 때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심정을 이해해 주었다면 그는 위로를 받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 고난을 통과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깝다는 친구들도 또 살을 맞대며 자녀를 10씩이나 낳아준 아내도 그에게 오히려 상처를 더 크게 안겨준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죽으라 고 했고... 악인 이라고 했고...기도하라 했고...불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바스의 중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욥 과 함께 해 주는 친구로서의 감정 이 입적 입장을 취하기보단 지혜와 지식을 내세워 우월한 입장에 서서 설교하고 충고하기를 좋아한 엘리바스를 하나님은 '옳다' 인정치 않으셨습니다. 욥기서의 결론 부분에서 하나님은 그 사실을 보여 주셨고 엘리바스는 욥 의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용서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열 수 있는 열쇠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혹시 고난당한 친구, 친척, 이웃을 만날 때 엘리바스의 입장에 서서 설교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시는지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종' 들 이 단에 서면 진리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됩니다. 그 말씀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며 순종하고 또한 신앙 태도를 개선하도록 결단하는 것은 신앙인들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단 밖에서 '친구' 또는 '이웃'이란 명목 하에 있을 때는 항상 '동질적 동료' 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두운 죄악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구원받은 죄인들이기 때문이며 한치 앞 을 모르는 인생사 속에서 누구나 동등하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난을 접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동료' 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당한 사람을 만날 때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동료로서의 '감정 이 입적 위로' 를 선물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친구' 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그리스도가 되신 '친구' 의 입장으로 고난 받는 우리 인생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분은 감정이입의 선물인 십자가를 안고 오셨습니다. (악 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나 칼날 같은 성령님의 말씀은 대언자 '종' 들을 통해 외치십니다만 예수님은 사랑과 은혜의 십자가를 안고 우리를 만나십니다.) 항상 사랑과 관심으로 우리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절망과 절규를 위로해 주시고 그분 안에 있는 소망을 풍성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아파 몸부림 칠 때도 '죽고 싶다' 고 울부짖을 때 도 현실에 놀라 떨며 어리둥절하여 횡설수설 할 때 도 (엘리야도 예레미야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함께 해 주시며 그 고난을 통과할 때 까지 우리의 짐을 지고 신앙의 길 을 함께 걸어가 승리를 거두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감정 이입으로 이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서 그분께서는 '우리 대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 처럼 묵묵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희생 제물이 되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욥 에게는 그러한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에게는 참 친구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계시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당하는 이웃을, 또는 친구를 만나면 엘리바스의 입장에서 설교하기보단 참 친구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한 사랑과 감정이 입적 이해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이름과 사랑으로 우리도 이웃에게 그 '감정이입'의 선물을 줄 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은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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